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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1908년 충청북도의 관찰부 이전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6.02.25 조회수 : 31

[2026. 02. 25.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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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1894∼1896)의 연장선에서 고종은 1896년 8월 칙령을 통해 8도제에서 충청도를 비롯한 5개 도를 남북으로 분리하여 13도 체제로 전환했다. 이때 남·북도 체제가 확립되었다. 교통과 통신이 미비한 상황에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관찰사의 관할 범위를 축소할 필요가 있었다.

 남·북도의 관찰부 소재지도 정해졌다. 충북은 남한강 물줄기를 배경으로 조선조 이래 중부권 최대 물류 도시이자, 충청도 감영이 설치된 바 있던 충주에 두도록 하였다. 관찰부 소재지인 충주가 충북도의 행정과 재판,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반면 청주에는 진위대가 설치되어 도의 군사 중심지가 된다.

 하지만, 1908년 5월 25일 순종은 충청북도 관찰부의 소재지를 청주로 옮긴다는 칙령을 발표한다. 11년 9개월 만에 충주는 수부(首府)의 지위를 내려놓게 되었다. 1896년 고종의 충남·북 분리 칙령과 달리 순종의 이 칙령은 누군가의 요청에 따른 재가(裁可) 형식을 띠고 발표되었다. 충북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이러한 결정, 누가 관찰부의 이전을 요구했고, 그들이 이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중앙의 사정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순종 편, 대한제국 관보, 통감부 문서, 지역 사정을 상세히 기록한 오오쿠마 야사부로(大熊彌三浪)의 『청주연혁지』(1923) 등을 검토해 이를 확인해 본다.

 당시 행정구역 개편은 오늘날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내부(內部)’ 관할이었다.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내부대신의 주청으로 황제가 재가,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또한, 도민 의사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관찰사 의견은 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인, 지역민이 관여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행정구역 개편은 내부의 소관이었으되 한일신협약(1907.7) 이후 ‘차관 정치’가 시행되면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은 내부의 일본인 ‘차관’이었다. 지방행정도 마찬가지였다. 그 실세는 "관찰사 보좌와 부윤(府尹)과 군수의 지도"(순종실록) 명목으로 배치된 일본인 서기관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충주를 비롯한 관찰부에도 일본인이 ‘고문’(재정, 치안, 통역) 자격으로 들어왔고(주한일본공사관기록), 한일신협약 이후인 1908년 1월부터는 각 관찰부에 서기관을 배치해 지방행정에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1896년 8월 충북도가 태동하고, 1910년 8월의 국권피탈까지 총 22명의 관찰사가 다녀갔다. 평균 8개월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그만큼 지역을 깊이 파악하기 어려웠다. 반면, 1908년 1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재직한 충북도 서기관, 가미야 다쿠오(神谷卓男)는 내부차관, 통감부와 소통하며 도 행정을 주도했다. 관찰부의 청주 이전도 그가 면밀하게 계획하여 성사한 일임을 『청주연혁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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