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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깨어나는 청주의 진산, 당산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4.11.13 조회수 : 37

[2024. 11. 13.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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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려와 달리 주말에는 수천 명이 찾고, 문체부 장관도 다녀갔다. 산 아래쪽에서부터 당산은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본래부터 당산은 그렇게 쉽게 잊혀서는 안 될 산이었다. 


 조선의 최고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950)과 그 증보판인 <여지도서>(1760) 등에 따르면 당산의 본이름은 ‘당이산(唐羡山)’이다(극히 일부 지리서에서만 ‘唐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리서의 산천조에서는 이곳에 토성 터가 있다고 했다. 이 토성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기까지 청주 읍치의 보루 역할을 했다. 치소(중앙공원 자리) 가장 가까이 있는 산으로 청주의 분지 지형 특성상 서쪽 경계까지 조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리서에서는 당이산을 와우산(우암산)과 구별하여, 치소로부터 1리(0.4km)에 있는 청주의 ‘진산(鎭山)’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도 등에서는 지역의 많은 산 중에서 ‘당이산’을 청주의 대표 산으로, 하나의 상징처럼 그려 놓았다. 청주의 진산이자, 주산이기 때문이었다. 지리서의 ‘단묘조’에서도 당이산이 등장한다. 고을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인 제향 공간으로 청주에도 ‘3단 1묘’(사직단, 성황단, 여단, 문묘)가 있었으니, 고을 수령이 주관, 국가 공인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당이산에는 이 삼단일묘 중, 성황단(城隍祠)이 있었다. 정삼품 청주 목사가 직접 주재, 관민이 한마음으로 고을의 평화와 주민의 안녕을 위해 성황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 성황사에 인접하여 문묘(향교)도 있다. 따라서 대성로 일대는 두 개의 중요 제향 공간이 있던, 큰 규모의 관치 의례가 수시로 행해진, 역사 문화적 장소로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당이산의 존재를 일제가 놓쳤을 리 없다. 1913년 무렵 이미 지역 최초의 공원, 동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1913년 5월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이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봄에 그 조망이 아름다워 사람의 흉금을 개활하게 한다’고 감탄했다. 또한, 전기발전소가 들어서 1913년 7월 17일 점등식을 시작으로 전깃불 시대를, 1922년 6월 18일에는 2년간의 공사 끝에 정수와 배수 능력을 갖춘 상수도시설로 통수식을 거행, 수돗물 시대를 열었다. 당이산은 충북 근대문명의 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도 입었다. 일제는 1910년대 초부터 소규모 신전 설치를 시작으로 1923년에는 제법 웅장한 신사를 신축하며 몸짓을 키워 갔다. 이 때문에 1936년 우암산으로 옮겨가기까지 총독들은 모두 당이산을 다녀갔다. 대신 청주의 보루로서 옛 토성 터와 관민이 하나 된 소망의 공간으로서 성황사는 훼손되고 잊힌 존재가 되어갔다.

  당산 벙커에서 진행되고 있는 ‘오래된 미로’는 당산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하는 하나의 시험이다. 고을의 수호와 안녕을 위해 관민이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함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당산은 높아가는 빌딩에 가려질 수 없는, 수천 년 청주 역사와 함께해온 청주의 진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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