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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이광사의 ‘양산가’와 한시 번역 문제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5.28 조회수 : 8

[2025. 05. 28.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33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영동의 양산 전투를 소재로 ‘양산가’라는 동명의 한시가 다수 창작되었다. 악부시의 비조에 해당하는 김종직의 ‘양산가’와 함께 살펴볼 만한 작품으로 이광사의 양산가를 들 수 있다. 원교 이광사(1705∼1777)는 조선 후기,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예술인이자 학자였다. 

 이원교의 양산가는 ‘원교집선(圓嶠集選) 권 제1 동도악부’에 실려 있다. 김종직의 시가 5언 14행 총 70자인데 비해 이광사의 것은 6언 44행(혹은 3언 88행) 총 264자로 장형이다. 그만큼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되어 있었다. 시는 처음과 중간 끝으로 분절되어 있는데, 각각 현재(영동)-과거(경주)-현재(영동)에 대응한다. 대부분 역사 시가 시간 순서를 중시한 것과 다르다. 처음에서는 양산의 전투 현장, 중간에서는 경주 시절 부마로서 화려한 삶, 끝부분은 다시 전장으로 옮겨 그의 최후와 그것이 갖는 의미로 되어 있다.

 그림에도 능했던 그의 작품답게 첫 부분에서부터 긴박한 전투 현장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압권이다. "험한 지세와 수풀 속에서(地勢阸多樹木) 군대는 고립되고 밤은 캄캄하였네, 일순 돌풍이 일어나 깃발과 뿔피리를 흔들고 불길이 산을 감싸며 함성이 계곡을 뒤흔들었다네, 적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화살은 우박처럼 쏟아지는데, 노한 장군이 말을 타고 홀로 창을 휘두르며 나아가니 위엄이 신과 같고 그 얼굴빛은 참으로 위풍당당하다"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중과부적, 최후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런데, 화자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끊고, 안락했던 경주에서의 삶을 플래시백 수법으로 이어간다. 삼국사기에는 없는 이야기다.

 그는 얼굴이 백옥같고 손가락이 가는(顔白玉 手指細), 재주와 식견까지 뛰어난(饒材識) 공주를 아내로 맞았고, 왕이 궁궐 가까이에 하사한 서까래가 석 자나 되는 큰 집에서 살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고, 밤낮으로 즐거움이 이어지는 생활을 했다. 돌연 변방에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모든 걸 내던지고 현장으로 달려 나온 것이다.

 다시 치열한 전쟁터로 무대가 바뀐 끝부분에서는 후퇴를 간청하는 휘하장수, 이를 뿌리치고 죽음을 선택하는 김흠운, 이들의 대화를 가져와 인물들의 됨됨이를 좀 더 극적으로 드러냈다. 김흠운 일행이 최후를 맞게 된 데에는 백제에 ‘만 명의 적을 상대할 만한 지혜와 용기를 갖춘’ 계백 장군(百濟將有階伯)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점도 주목된다. 신라인의 입장에 치우친 여느 시와 달리 상대적으로 균형 잡힌 태도를 보여준다.

  이광사는 뛰어난 묘사와 상상력으로 양산가를 좀 더 ‘예술’에 가깝게 해 놓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광사의 이 작품은 아직 ‘정본’에 해당하는 번역이 없다. 이광사의 양산가를 다룬 몇 편의 논문에서 번역을 수반하고 있지만, 그 대의(大意)에서도 제각각이다. 한시는 함축된 문장에다 ‘전고(典故)’가 존재한다. 중국의 역사, 인물, 지명, 고사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 현재의 학문적 토양에서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온전한 번역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다행히 우리 지역에는 이두희 선생님 같은 뛰어난 한학자분들이 계시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시 번역으로 그 정점에 있는 영동 출신의 정민 교수도 계신다. 공신력 있는 기관이 나서서 지역을 대표할 만한 작품에 한해서라도, 이분들의 중지를 모아 ‘합의된 정본’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도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소통하지 않은 역사 자원은 익명의 유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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