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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충북 근대 미술의 서막과 일본인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6.11 조회수 : 8

[2025. 06. 11.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33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충북의 공연예술과 관련된 기록을 정리해 보았다. 화제를 옮겨 충북의 근대미술사를 중심으로 한 전시 예술 부문을 살펴보려고 한다. 공연 분야도 그랬지만, 근대 미술 역시 전통 미술과는 단절적인 측면이 강했다. 이런 성격은 용어에서부터 확인된다. 근대의 ‘미술’은 공간 및 시각 미를 표현하는 예술로 정의되고, 회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등을 망라한다. 이 중에서 조선시대에도 썼던 용어로는 회화, 조각, 공예, 사진 정도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양식 정의와는 유사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크다.

우선, 오늘의 ‘미술(美術)’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단어가 없었다. 미술은 일본 정부가 서양의 ‘art’를 번역, 1873년 빈 국제박람회에 참가하면서부터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술에 근접한 개념으로는 ‘서화’(書畫, 오늘날 서예+회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도 널리 쓰였다. 그림에 대응하는 ‘회화(繪畵)’라는 말도 본래부터 있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도화(圖畫)’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는데 일제강점기 교과목 명칭으로도 쓰였다. ‘공예(工藝)’ 역시, 현재의 미적인 요소보다는 실용적인 요소가 더 강조되었지만, 어느 정도 유사한 개념으로 써 온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조각(彫刻)이란 말은 본래부터 써 왔으나, 오늘날, 나무나 돌을 깎거나 쪼아서 ‘입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내는 행위’보다는 ‘은장도 칼집의 조각’ 예에서처럼 무늬나 장식을 새길 때 쓴 말로 ‘새기다’에 중점을 둔 말이었다. ‘사진(寫眞)’ 역시 왕조실록 등에 등장하지만 카메라와 상관없이 있는 모양 그대로 그려 낸 그림의 뜻으로 사용했다. ‘서예(書藝)’는 아예 없던 말로 역시 일본이 메이지 시기 서구어 ‘Calligraphy’를 받아들여 번역한 말이다. 우리는 서예 대신에, 서(書), 서법(書法), 서도(書道)라는 말을 썼었다.

없던 용어가 생겨나고, 그 뜻이 달라진 만큼, 근대 미술은 이전과는 다른 새출발을 해야만 했다. 물론 전통에 기반을 둔 동양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인격 수양’을 위한 감상의 대상이라는 제한된 역할을 탈피해야만 했다. 공모전과 전시회에 출품, 대중의 평판도 들어야 했고, ‘명작’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평가가 수반된 입선과 특선의 통과의례도 감내해야 했다. 동양화 역시 이제 수양의 도구를 넘어 하나의 작품으로, 상품으로서 변모를 겪게 된 것이다.

새롭게 출발한 우리 지역의 근대 미술, 그 미술사의 첫 자리에는 스승도 학교도 드물었다. 대신 일본에서 건너와 이 땅에 정착(?)한 미술에 소양을 가진 일본인이 있었다. 나중에 한국 미술사를 빛낸 충북 출신 미술인들이 경성, 동경 등 넓은 세상으로 나가 미술을 배우는 동안, 지역 미술사의 첫 자리를 채운 이들은 대부분 그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큰 권위를 가졌던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가 1922년부터 시작되었다. 1회 동·서양화 부문 입선자 중 충북 주소지 3인은 일본인이었다. 1944년 총 23회까지 지속된 이 ‘미전’에서 충북 연고 미술인의 입선 이상 작품 수는 총 133점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주소지를 ‘충북’으로 밝힌 미술인의 작품 수는 61점인데, 1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의 것이었다. 11점을 출품한 한국인 역시, 영동의 권구현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낯설다. 지역 예술사에서는 좀 더 ‘지역적 시각’이 요구된다고 할 때, 우리 지역에서, 전시회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우리 지역의 사람과 풍경을 작품 소재로 삼았던 이들에 대해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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