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이름} 상세보기 - 제목, 작성자, 게시일, 조회수, 내용, 첨부파일 정보 제공
[충청매일] 충북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와 전시 공간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8.06 조회수 : 8

[2025. 08. 06.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45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1910년대라는 시기에서 ‘전시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근대미술이 이제 사적 공간을 중심으로 한 개인의 취미에서 벗어나 공공장소에서 진열, 일반인의 관람 대상이 되었다는 것, 무엇보다 전시 작품의 가치 확산을 넘어 미술에 생소했던 당시 사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교육 기능을 했다는 것. 이로써 지역 미술이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확인되는 충북 최초의 미술 전시회는 성안길 요릿집 ‘청주관’에서 1916년 2월 초에 행해졌던 김응원의 난화(蘭畵) 전시회로 휘호 시연과 함께 판매도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다음은 1918년 7월 이틀간 도하정(문화동) ‘북일루’ 요릿집에서 열렸던 ‘서화골동회’로 역시 우리 전통의 글씨와 그림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최초 서양화 전시회는 이보다 늦은 1919년 6월 청주읍 성동정(城東町, 읍성 밖 동쪽 지역, 문화동)에 소재했던 정토종포교소에서 일본인 화가가 주도한 ‘양화(洋畫)전람회’였다. 당시 언론은 "프랑스 화가 ‘마시얄’에게 사사한 서양화가 ‘편천설로(片川雪路)’가 수십 점 작품을 진열하여 양화의 진미(眞味)를 깨닫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매일신보, 1919.6.11.). 

 1916년의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1930년대에 이르면 지역에서도 전시회가 좀 더 일반화된다. 전시 작품도 ‘동양화’ 중심에서 ‘서양화’로 옮겨간다. 이 일련의 과정에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도 큰 역할을 한다.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북에서도 다수의 수상자가 배출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지역의 전시회를 주도하는 주체로 부상한다. 이제 지역 미술 전시회도 외지 화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기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전시 활성화를 위해서는 공간의 확보가 중요하다. 일정 규모 면적과 층고를 갖춘 실내 공간, 기왕이면 조명 기능을 할 전등도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전시 및 그 공간과 관련하여 확인되는 자료는 도내 여느 지역보다 청주가 압도한다. 청주는 1905년 경부선 개통, 1908년 충주에 있던 관찰부의 이전과 함께 일본인 유입과 근대 건축물 건립이 가속화한다. 도내 다른 지역보다 10년 이상 빨랐던, 1913년 7월부터 개시된 전기 점등도 이 같은 실내 예술 활동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10년대 전시 공간으로는 포교소 같은 종교시설도 있었지만, 규모를 갖춘 요릿집이 중심이었다. 근대 초기 이 요릿집들은 시민들의 회합 장소이자, 예기(藝妓)의 공연, 또 미술 작품 전시가 있었던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1920,3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학교 강당이 대세가 된다. 해당 학교의 미술 교사와 학생 작품뿐 아니라 일반인 상대의 다양한 전시가 개최되었다. 그중 인기 장소는 일본인이 다닌 청주제일공립고등여학교와 현재 충북도의회가 들어서는 자리에 있던 청주공립심상고등소학교(옛 중앙초)의 강당이었다. 이곳에서는 제1회(1941)와 제2회 충북미술전람회(1942)가 개최되기도 한다. 

  좀 더 전문적인 미술인이 애용한 시설로는 개관 당시 모던 건물로 주목받았던, 1926년 4월 개관한 청주 본정 3정목(북문로 1가)의 청주금융조합, 1936년 12월 개관한 충북도청 정문 왼편의 산업장려관(현재 카페) 2층으로 확인된다(계속).


 

↓ 원문보기 클릭 

기사원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