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매일] 충북에 정착한 1세대 미술인, 김기창과 안승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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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22.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57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충북 출신은 아니지만, 선전에서 수상하고 나서, 이후에 충북에 ‘정착’한 미술인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분야의 인물로는 동양화의 운보 김기창(1913∼2001)과 서양화의 안승각(1908∼1995)이 있다. 서울 출신 김기창은 말년에 어머니의 고향인 청주 청원구 내수읍 형동리로 와 ‘운보의 집’을 짓고 1984년부터 2001년 타계 시까지 살았다. 그와 그의 아내 화가 박래현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김기창은 화려한 수상 실적을 자랑한다. 그는 경성을 주소지로 하여 18세 나던 1931년 제10회 선전의 입선작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를 시작으로 마지막 선전인 44년 23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냈고, 매년 수상까지 했다. 1931년의 첫 입선 당시 언론은 ‘귀머거리 소년 미전에 입선’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주목했다. ‘이 소년의 노력에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귀머거리’라 함은 그가 7세 되던 해 장티푸스를 앓은 뒤 청력을 잃고 말까지 어눌해진 사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화려한 그의 수상실적은 심미안의 밝은 눈으로 청각 장애에 대한 세상 편견과 맞서고자 했던 치열한 산물이 아닐까도 싶다. 그는 31년 선전 10회에서부터 36년 15회까지 내리 입선했고, 이어 37년 16회 ‘고담(古談)’을 시작으로 40년 19회 ‘여일(麗日)’까지는 4년 연속 특선을 한다. 이어 41년 20회 ‘춘앵무’를 시작으로 44년 23회 ‘아악이제(雅樂二題) 중 가야금’까지 연속 4년 추천작을 냈다. 그는 선전을 통해 입선 11점, 특선 4점, 추천이 4점, 총 19점의 수상 작품을 남겼다. 추천제는 35년 14회부터 도입된 것으로 수차례 특선한 자, 특선 횟수는 적더라도 선전에 특별한 공이 있는 자를 심사위원과 총독부 학무국의 협의로 선정, 출품 시 심사 과정을 면제받고 작품 전시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 제도다. 화가에게 일종의 ‘공인 자격’을 부여한 것으로 명예와 출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물론 미술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식민지 통치의 도구적 성격도 있었다. 한편, 안승각은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1943년 청주상업학교의 일본인 교장 요청으로 이 학교에 부임하면서 청주에 정착, 1978년 상경 시까지 청주에서 교사로 또 교수로 미술을 가르치면서 윤형근·정창섭 같은 한국 미술계의 거장을 길러냈다. 안승각은 1938년 김기창보다 늦은 31세의 나이에 선전에 데뷔했다. 그는 황해도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뒤늦게 일본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38년(17회) ‘청음(聽音)’, 39년 ‘호반(湖畔)’, 40년 ‘편물(編物, 뜨개질)’, 42년(21회) ‘피난민’(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으로 네 차례 입선했다. 앞의 세 작품은 출품 시 주소지를 동경으로 했고, 뒤에 한 작품은 경성으로 했다. 또한 앞의 두 작품은 ‘안승각’으로 뒤에 두 작품은 ‘안정 승일(安井承一 )’이란 이름을 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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