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매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과 충북의 대응 ③ 전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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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부터 지속적으로 충북·충남의 합병설이 나돌았고, 통합 후 도청 소재지가 어디가 될지 관심사가 되었다. 모호한 태도를 보여 온 총독부는 1931년 1월 공주에서 대전으로의 충남도청 이전을 공식화했다. 이는 충남·충북의 합병을 전제로 한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이 와중에 4월 26일자 일본 현지 신문에 실린 총독부 재무국 사계과 과장의 ‘충남북도를 합병하여 경비를 절약한다’는 인터뷰 내용이 충북에 전해졌다. 충북인들은 양 도의 합병은 단순한 행정구역 개편이 아니라 충청북도가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청주에서는 4월 30일 공회당에 시민 1,500명이 모여 대회를 열고, 大충북건설기성회를 창립하는 한편, 총독부에 반대 의사를 전달할 진정(陳情) 위원을 선발했다. 상경 위원단은 5월 3일 천여 명 인파 속에 청주역을 출발했다. 언론은 청주역 개통 이래 배웅 나온 사람 많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라 쓰고 있다. 5월 5일 저녁에는 공회당에서 귀청(歸淸) 보고 대회를 열고 총독부 입장을 전했다. 사이토 총독으로부터 "자기 임기 내에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애매한 답변을 얻었다는 것이다. 총독은 임기를 불과 한 달여 남겨 놓고 있었다. 다음 달인 6월 17일 우가키 총독이 부임하자 청주에서는 이 문제의 매듭을 짓고자 9월 3일 총독부에 다시 진정 위원을 파견했다. 하지만, 역시 기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 일본에서 행정구역 통폐합은 흔한 일이지만, 조선은 특수한 사정은 있고, 또 신임 총독이 조선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지금은 논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1932년 9월 삼엄한 경비 속에 트럭 20여 대가 매일 2회 왕복, 일주일에 걸쳐 대전으로의 충남도청 이전을 완료했다. 10월 14일에는 총독이 참가한 성대한 이청식도 치렀다. 이후 대전의 시세는 급격히 확장하여, 그동안 충청의 웅주를 자처해 온 충주, 청주, 공주, 홍주(홍성)를 뒤로하고 ‘대전 시대’를 연다. 반면 충북(청주)에는 여전히 ‘합도설’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이를 제거하지 않는 한 상공업 진흥과 도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통합의 빌미가 된 협소한 면적과 약한 도세를 극복하고, 더불어 낡고 협착한 도청사(중앙공원 자리) 문제를 해결코자 노력했다. 우선, 구역 확장을 위해 강원 남부의 평창·영월·원주, 청주 관문이 된 조치원을 충북에 편입시키고자 하였고, 해당 지역으로부터 일부 호응도 얻었다. 또한, 도세 확장을 위해서는 교통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사설철도인 충북선의 국철 전환과 함께 충북 남북을 가로질러 동서 해안까지 닿는 횡단 철도 건설을 주장했다. 위로는 제천·영월을 통과하여 동해안 강릉까지, 아래로는 군산과 마주한 장항까지 연장하여 충북을 동서 해안에 연계하자는 것이었다. 상경한 진정 위원들은 총독부에 이러한 충북의 입장을 수차례 전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 주민을 안심시키는 방편으로 번듯한 도청사를 짓자는 안이 1931년 5월부터 제기되었고, 1937년 10월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된다. 따라서 현재 그림책 정원 1937이 자리한 도 청사는 충북도의 존립을 염원한 지역사회의 노력이 빚어낸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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